읽을거리2016. 7. 6. 18:36

모욕에 대한 논의들은 표현의 자유라는 쟁점 주위를 맴도는 경향이 있다. 이는 모욕이 본질적으로 (분노나 경멸 같은) 감정을 표현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모욕이 공적인 관심사에서 주변화되는 이유도 그래서인데,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설령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표현된다고 해도,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주관적인 표현은 객관적인 사물의 상태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누가 나를 돼지라고 부른다 해서 내가 정말 돼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에게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이라고 점잖게 응수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모욕을 이처럼 감정의 표현 내지는 잘못된 재현으로 이해할 때, 말과 몸짓이 지니는 수행적 차원은 간과되고 만다. 나를 돼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한 명뿐이라면, 나는 그를 무시해버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둘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마침내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나를 돼지라고 부르기 시작한다면, 나는 실제로 돼지가 된다(따돌림받는 아이들이 숱하게 겪는 일이다).

수행성의 간과는 상호작용 질서에 대한 정태적인 접근과 관련이 있다. 상호작용 의례의 수행은 규범의 단순한 실천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구성원들 각자가 사회에 대한(사회의 경계와 위치들의 관계, 그리고 그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신의 이해방식을 드러내고 또 승인받는 과정이다. 그런 만큼 의례의 교환은 단절의 계기들을ㅡ즉 모욕의 가능성을ㅡ 내포한다. 문법에 어긋나게 말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문법 자체를 위협하지 않는 것처럼, 규칙의 위반이 일탈로 규정되는 한 우리는 그러한 위반을 무시하고, 분석에서 제외할 수 있다. 하지만 위반은 때로 규칙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해진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노숙자가 말을 걸어올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길을 피하며 대답하지 않는다. 이러한 반응은 명백하게 상호작용 의례의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비슷한 예로, 인종 간의 공간적 분리가 뚜렷했던 1950년대 미국에서는 흑인이 콘서트홀이나 갤러리 같이 사실상 백인들을 위한 장소에 나타났을 때, 그가 복장 코드에 맞게 옷을 입고 교양 있게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무시와 모욕으로 응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경우에 백인 상호작용 의례의 규칙을 위반하더라도 지배 문화의 관점에서 잘못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에게 이런 위반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흑인이야말로 무례한 행동을 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상호작용 질서가 규칙들의 단순한 집합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어떤 역동성 속에서 분석되어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규범 일탈의 예시가 좀 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듬. 예를 두 개 든 만큼 하나는 좀 더 입체적인, 상호작용 안에서 상호적으로 일탈을 시도하고 그것이 새로운 기호로 읽히는 사례였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럼 너무 복잡해서 요점이 흐려질 가능성이 있어서 이렇게 쓴건가? 역동성 속에서 분석되어야함이 더 와닿을 수 있게 적당히 재밌는 예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가고자 하는 길이 다른 길이어서 이렇게 쓴걸까. 페터 비에리 삶의 격이나 어빙 고프만이 생각나는 지점이 참 많은데 이 책이 앞의 둘에 비해 좀 더 단순하다.)

상호작용 질서는 인정투쟁 속에서 불안정하게 재생산되는 역사적 구성물이며, 무시와 모욕은 이 구성물에 내재한 균열을, 그것의 현재 안에 있는 다른 시간들을 드러낸다.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노숙자의 뒤에는 걸인과 부랑자에 대한 낙인과 감금과 추방의 긴 역사가 있다. 도시 공간의 재편 과정이기도 했던 그런 역사에 대해 모른다면, 노숙자가 겪는 작은 굴욕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미국에서 흑인 남자가 '백인 동네'를 지나갈 때 경험하는 전형적인 반응들(다급하게 멀어지는 발걸음, 찰칵하고 자동차 문을 잠그는 소리, 노골적인 경계의 시선)을 설명하려면, 흑백분리가 존재했던 시대, 그리고 그 이전의 노예제가 지배했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욕을 두껍게 기술함으로써 상호작용 질서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역사적인 깊이를 더할 수 있다. (오..ㅋㅋㅋㅋㅋ중층적기술.. 내가 이 책 읽으면서 느끼는 것들이 사회학 인류학 개념이 익숙하지 않는 대중을 상대로, 그리고 한국 출판시장의 수준과 상황을 고려하여 쓰여지느라 그렇게 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듬.. 강조는 하지만 굳이 개념의 원천을 설명하지는 않는 식으로 넘어가는 게 많다. 인정투쟁도 그렇고4장의 논의는 이러한 작업을 위한 밑그림이다. 우리는 현대 사회가 상호작용을 규제하는 강력한 규범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할 것이다. 의례적 평등의 원칙이 그것이다. 현대 사회는 모든 구성원에게 동등한 인격을 부여하는데, 이는 한편으로 법 앞에서의 평등으로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 의례 교환의 대칭성(내가 너에게 인사하면, 너도 나에게 인사한다)을 통해 확인된다. 하지만 이 원칙이 언제나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낙인과 수용소에 대한 고프먼의 연구는 사회가 그 내부에 일체의 존중의 의례가 사라지는 예외 지대를 마련해두고 있으며, 특정한 범주의 사람들에게 비정상의 낙인을 찍어서 배제와 조건부 통합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여전히 신분주의와 싸워야 한다ㅡ유교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낡은 신분주의만이 아니라, 배금주의의 토양 위에서 맹렬하게 퍼져나가는 새로운 신분주의와. 1987년 노동자대추쟁 이전까지 한국 사회는 '노동자=못배운 사람'이라는 등식이 지배하였고, 이는 조선시대에 양반이 상민에게 그랬듯이 노동자를 '하대'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관리자가 노동자에게 나이에 관계없이 반말을 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고등교육이 일반화된 오늘날, 이런 종류의 신분 차별은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이 사람대접을 못 받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사실 1퍼센트를 위한 사회에서 사람은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는 대접받기 힘들다. 사람 위에도 '매우 중요한 사람(VIP)' '매우 매우 중요한 사람(VVIP)' 등이 있기 때문이다. '매우 중요한 사람' 앞에서 그냥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 '노바디'가 되고 만다. 아래에서 우리는 단편적이나마 이런 문제들을 다룰 것이다.


김현경, <사람,장소,환대> pp.10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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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누뉴누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