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지 재단이 “인터넷이 당신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바꾸어놓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펴낸 책 <우리는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중
케빈 켈리, <깨어 있는 꿈>
우리는 기술을 이용하면 두뇌 작동 방식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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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긴 나눗셈은 물론 곱셈을 할 때도 중간값을 기억하려 들지 않는다. 오래전에 기록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종이와 연필 덕분에 셈을 할 때 “한층 똑똑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실을 기억하거나, 어디서 그런 사실을 찾아냈는지도 기억하려들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해 찾아내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제 인터넷이 내 연필이자 종이이므로 사실을 찾을 때도 “한층 똑똑해진 것”이다.
하지만 내 지식은 그만큼 취약해졌다. 받아들일 만한 지식을 찾을 때마다 멀지 않은 곳에 이 사실을 반박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사실fact에는 반사실antifact이 있다. 극도로 복잡하게 얽힌 인터넷 하이퍼링킹 덕분에 사실만큼이나 반사실도 눈부시게 빛을 발한다. 일부 반사실은 엉터리지만 그럴듯한 것도 있고 타당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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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확신하는 일이 줄었다. 밖에서 권위를 찾기보다 나 스스로 확신을 키워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관심을 두는 분야뿐 아니라 손에 닿는 무엇이든 이런 식이다. 내가 관심을 두는 분야뿐 아니라 손에 닿는 무엇이든 이런 식이다. 하다못해 직접적인 지식이 전혀 없는 분야도 마찬가지다. 이는 대체로 내가 아는 것이 틀렸다고 가정하는 사례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과학 하는 사람이라면 완벽한 상태라 여길지도 모르지만, 내가 잘못된 이유로 마음을 바꿀 가능성도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하튼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내 사고가 바뀐 게 사실이다.
불확실성은 일종의 유연성이다. 내 사고가 한층 더 유연해졌다고 생각한다. 교과서에 실린 글처럼 못박혀 있지 않고, 가령 위키피디아에 있는 글처럼 좀더 융통성이 있다. 내 의견은 자주 바뀐다. 관심도 금세 커졌다 금세 사라진다. 완전한 단 하나의 진리는 심드렁하고, 복수의 진리들에 더 관심이 있다. 이제 내 주관의 중요한 역할은 수많은 데이터 유입 통로에서 객관을 조합하는 일이다. 불완전한 과학을 단계별로 끈질기게 점진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무언가를 아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인다.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으면 나 자신이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어 미덥지 않은 부분을 믿어보려 애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수없이 많은 반진실과 비진실, 다른 엉뚱한 진실들 속에서 참된 진실을 조합해내려 애쓰다 보니(이제 이런 지식의 조합은 권위 있는 누군가가 아닌 우리의 몫이다) 내 마음은 유연한 사고방식(여러 시나리오, 잠정적인 믿음 등)과 매쉬업, 트위터, 검색 등 유연한 미디어에 끌리게 된다. 하지만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아찔한 웹을 여행하다 보면, 꺠어있는 꿈을 꾸는 느낌을 받곤 한다.
우리는 왜 꿈을 꾸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꿈이 어떤 근본적인 욕구를 달래준다는 것만 알고 있다. 추천 링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웹을 서핑하는 나를 누군가 지켜본다면 백일몽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 어쩌면 TV, 라디오, 신문 등 직접적인 정보를 접할 때는 닿지 못하는 집단 무의식을 활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클릭으로 꿈을 꾸는 것은 각자 무엇을 클릭하는 우리 모두 같은 꿈을 꾸는 방법일 수도 있다.
인터넷이라 부르는 이 깨어있는 꿈은 진지한 사고와 재미를 위한 내 사고의 경계마저 모호하게 한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더 이상 온라인에 있을 때 일하는 건지 노는 건지 구분하지 못한다. 혹자는 이 두 영역의 분리가 인터넷의 폐단이라고 지적한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며 하찮은 일에 시간을 소비하기 딱 좋은 환경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나는 창의성을 발휘하려면 그 전제 조건으로 얼마간의 시간 낭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난 놀이와 일, 진지한 사고와 재미를 위한 사고의 융합이 인터넷이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이라 믿는다.
사실 인터넷의 주의력 감소 경향은 과장된 면이 있다. 나 또한 과도한 지식으로 가득한 내 정신이 나날이 작아지는 정보 조각들 하나하나에 주의력을 빼앗기는 느낌을 받는 게 사실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작은 정보 조각들에 완전히 정신이 팔리는 경험은 누구나 한다. 이런 줄기찬 정보 조각이 쏟아지다 보니 인터넷 문화는 큼지막한 덩어리를 작게 잘라 파느라 정신이 없다. 음반도 조각내 곡단위로 판매한다. 영화는 예고편 수준으로 짧아지고 더 작은 영상 조각으로 분해하기도 한다. 신문은 트위터 메시지로 변신한다. 과학 논문도 토막 내 구글에 올린다. 나는 이런 단편들의 바다에서 즐겁게 헤엄친다.
이런 정보 조각들을 찾아 인터넷에 뛰어들거나 생생한 꿈속에서 서핑할 때면 사고방식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내 사고는 한층 더 적극적이지만 사유는 적어진다. 정처 없이 고민하여 의문이나 예감을 해결하려 들면 내 무지만 뼈저리게 느낄 뿐이기 때문에 차라리 곧바로 행동에 옮긴다. 곧장 파고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찾아보고, 검색하고, 물어보고, 질문하고, 데이터에 반응하고, 파헤치고, 메모하고, 즐겨찾기를 만들어 흔적을 남기며 뭔가 내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나는 기다리지 않는다. 기다릴 필요가 없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고민하는 대신 먼저 행동에 옮긴다. 사유의 실종이 인터넷 최악의 폐단이라 여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이런 실속없는 활동이 그저 속 빈 강정같이 어리석은 허튼짓이자 신기루를 좇는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 난 이런 의문이 든다. ‘무엇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인가?’ TV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상전 행세를 하는 신문에 굴종하거나 그저 집에서 오락가락하며 아무런 새로운 외부 입력 없이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는 것에 비해서 그렇다는 말인가? 내가 보기엔 먼저 행동에 옮기는 편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
블로그와 위키피디아의 등장 역시 동일한 욕구의 표출이다. 행동(쓰는 것)을 먼저 하고 생각은 (걸러내는 건) 나중에 하겠다는 뜻이다. 내가 보기엔 바로 이 순간 온라인에 있는 수억 명의 사람이 어리석은 연관 링크를 따라다니며 시간 낭비하는 게 아니다. 50년 전 똑같은 수억 명의 사람과 비교해 한층 더 생산적인 사고방식에 몰입해 있는 것이다.
이런 접근 방법은 작은 조각 정보를 부추기지만 놀랍게도 그와 동시에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크고 정교한 작업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리게 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작업은 더 많은 데이터를 담고 있고 오랜 기간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인터넷이 확장될수록 성공 확률이 높다. 한쪽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이런 추세는 언뜻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흔히 인터넷을 글과 동일시하는 근시안적 사고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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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들은 얽히고설킨 다중 줄거리와 다수의 주인공, 대단히 심오한 캐릭터 묘사로 꾸준한 주의력을 요구한다. .. 디킨스 등 옛날 소설가들이 큰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기도 하다. (“그 긴 내용을 다 이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더 보길 원한다는 건가? 대체 몇 년 동안?”) 본인도 그런 복잡한 스토리를 즐기거나 그럴 시간을 투자할 만큼 관심을 두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주의력이 성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게임 역시 그런 마라톤 영상물이나 유명 책에 견줄 만큼 심오하고 복잡해졌으며 수요 역시 부쩍 늘었다.
하지만 내 주의력의 방향을 바꾸고 그에 따라 내 사고까지 바꾸면서 인터넷이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언뜻 나는 매일같이 트위터에서 끊임없는 나노초를 보내고, 웹페이지를 서핑하거나 다양한 채널을 오가며 줄기차게 마이크로초를 허비하며, 이런저런 책의 발췌된 내용을 훑어보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비칠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 난 매일 인터넷에 주의를 기울이며 10시간을 보낼 뿐이다. 몇 분마다 인터넷으로 돌아온다. 매일같이 반복된다. 기본적으로 항상 인터넷에 집중한다 할 수 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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