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한지 사흘쯤 되었을때, 씨디님이 내게 "글씨 좀 쓰니?"라고 물어보셨다.
뭐 시키려고 물어보신 게 아니고 그냥 물어보고 넘어갔는데,
이 질문이 왜 뜬금없는 게 아닌지는 나중에 알았다.
아트님 한 분은 캘리그라피를 부업으로 하시고,
카피님은 본인의 글과 그림에 브랜드(여기에 쓰면 검색하다가 내 블로그를 발견하실까봐 브랜드라고 하고 넘어간당)를 붙여
사보에 매번 한 쪽씩 올리시는 데다, 그 글과 그림들을 볼 수 있는 안드 어플도 있다는 것 같다.
지난 피티 준비할 때 논현동의 편집실에서 '이거랑 이거 써주세요' 하니까
두분이 손글씨를 써 오셨고 그게 광고 애니메이팅(경쟁피티를 위해 광고 시안을 만드는 것. 진짜 광고 만드는 것처럼 완성도에 공을 들인다. 콘티만 보며줘도 될 자리에 애니메이팅을 하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한다. 엄청 비효율적인 것 같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저번에 돈 갚으면서 카드와 편지 중간쯤에 해당하는 것을 써 드렸을 때 카피님께 글씨 칭찬을 받았다.
캘리그라퍼도 아닌 사람의 손글씨가 어딘가에 쓰일 수 있다는, 회사생활에서 그게 능력치의 일종일 수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첫사랑이란 무엇일까 생각이 들어서인데
방금 늦잠자고 일어나 첫 주말을 만끽하다가 처음 사귀었던 남자친구의 손글씨가 문득 떠올랐다.
오랜만에 그 글씨와 기억들을 떠올리니까
글씨를 보고 사람을 존경하게 되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구나 하는 새로운 인식이 생겨서 쓰는 글이다.
나랑 혈액형도 별자리도 똑같았던 그 친구는 한창 난리나는 나이였는데,
그 때의 걔에게는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엄청난 에너지가 한쪽으로 비켜서 있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이후의 그 아이를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걔가 변하는 걸 보지 못했다면 그 때가 걔의 리즈였다는 생각은 못하고 그냥 걘 그런 애였다고만 기억이 박제됐을듯
아무튼 맨날 학교나 학원에 갇혀 있고, 입에 욕을 달고 살고, 사춘기의 자의식이 가득해서 끼도 넘치고,
그래서 항상 시끄럽고 사건이 있고 여자애들에게 인기도 많은 그런 애였다.
편지 써주기를 좋아했는데, 꼭 샤프로 썼다. 펜으로 뭔가를 쓰는 걸 본 적이 없다.
글씨는 아주 작고, 웹폰트 같은 느낌도 있었지만 어디서도 결코 보지 못한 글씨였다.
이후로도 그런 글씨는 본 적이 없다.
캘리그라피라는 게 있지도 않던 시절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너무 아깝다.
정갈하고, 그 아이의 자기다움이 느껴졌다.
글씨를 너무너무 잘썼는데도
여자애같은 느낌이 든다거나
제도권 교육을 받으면서 필기를 하는 것만이 글씨의 탄생 배경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듯한 반듯함이
있지도 않았고,
뭔가 시적인 데가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예술적으로 꾸민 느낌이 전혀 안들었다.
걔는 그 서체가 아닌 다른 글씨체로 글씨를 쓰는 법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매번 너무 눌러 쓴 것도 아니다.
고등학교를 시골의 기숙사로 가면서 억눌림이 극에 달했던 시기,
걘 나 몰래 수첩에다 매일 편지 겸 일기를 써서 한 권을 다 쓰자 선물로 주었었다.
거기엔 수업듣기 지루해서, 기숙사의 친구들로부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수첩을 펼쳐든 그 친구의 순간순간이 담겨 있었는데
이전의 편지들에는 없었던 그림이 추가되었다.
걔에 대한 기억이 대체로 가물가물해서 수첩도 흐릿하지만
크림빵이 기억난다.
자기는 크림빵이 제일 좋다면서
조그마하게 크림빵을 그려놓고
ㅋㅡㄹㅣㅁㅃㅏㅇ... 이렇게 낙서도 해놓았었다 ㅋㅋ
한참 나중에 왜였는지 나는 이 수첩의 많은 부분을 지우개로 지워버렸었다.
수첩을 버렸는지 어쨌는지도 기억이 안난다. ㅠㅠ
방구석에 있는지 궁금하지만 찾아보지는 않으련다.
어쨌든 첫 연애에서 연애,사랑,관계에 대해 내가 깨달은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서
꼭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인가? 그거 같이 ㅋㅋㅋㅋ
그랬었네 하는 게 갑자기 생각나서 기록을 남긴다.
아주아주 오래된 기억인데도 새로운 인식이 덧씌워지는 이런 순간이 뜬금없이 찾아오는 것이 흥미롭다.
첫 연애를 오래 하고, 그 사이에 다른 남자를 만났다가 돌아오는 과정도 끼워져있고,
각자가 상대에게 질려도 보고 집착도 해보고
더 이상 좋아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는데도 사귀는 경험도 해보고
그랬던 게 신기하다.
너무 무뎌져서 기억도 잘 안나고 얘기할 거리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