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거리

실체와 책략

누뉴누누 2016. 5. 15. 12:29

영미 문화에는 행동을 개념화하는 두 가지 상징적 모델이 있는 듯하다. 하나는 참되고 진지하고 정직한 행동을 가리키는 참된 공연모델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연극배우의 공연이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기꾼의 작업처럼 철저하게 꾸며낸 거짓 공연모델이다. 우리는 참된 공연을, 일부러 꾸며낸 것이 아니라 상화에서 나타난 사실에 개인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해 나타난 의도치 않은 결과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꾸며낸 공연은 즉각적 반응이라고 볼 만한 실체가 없으므로 하나하나 힘들여 거짓을 짜 맞춘 것으로 보곤 한다. 이런 이분법적 개념은, 정직한 공연자라는 이데올로기를 전제하기 때문에 공연을 하는 데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공연을 분석하는 데는 빈약한 개념이라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먼저, 습관적으로 투영하는 상황 정의가 참된 실체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이 많다고 인정하자. 나는 그렇게 믿는 인구 비율을 문제 삼을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사람들의 진실성과 그들이 보여주는 공연의 구조적 관계를 다루려 한다. 공연이 이루어지려면 목격자들이 대체로 공연을 하는 사람들의 진실성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진실성이 사건의 드라마에서 차지하는 구조적 위치가 바로 이 지점이다. 공연자가 진실한 사람ㅡ진실하지 않은데도 자신이 진실하다고 믿는 사람ㅡ일 수도 있지만, 배역에 대한 애착이 설득력 있는 공연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프랑스 요리사 행세를 하는 러시아 스파이나 한 남자의 아내면서 다른 남자의 정부 노릇을 하는 여자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런 이중행각이 실제로 존재하고 또 오랜 시간 성공적으로 유지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는 사람들의 됨됨이는 보통 겉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런 겉모습 역시 관리될 수 있는 것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실체와 겉모습의 관계란 통계적인 것일 뿐 반드시 본질적이거나 필수적인 것은 아닌 셈이다. ... 완벽하게 거짓임에도 성공하는 공연이 있고, 완벽하게 정직해서 성공하는 공연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공연의 본질은 그런 극단적 유형에는 속하지 않으며 연극적 관점에서 권장할 만한 것도 아니다.


 이런 논의에는, 정직하고 진실하고 진지한 공연이 사람들의 생각만큼 견고한 실제 세계와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가 함축되어있다. ... 훌륭한 공연자가 되려면 심층적 내면 연기의 기법을 익히고, 오랜 시간 훈련을 받고, 심리학적 소양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만 너그러운 관객 앞에서는 누구나 재빨리 각본을 익히고 꾸며낸 연기에 얼마쯤 진실성을 담을 줄 안다는 사실도 관과해서는 안된다. 일상의 사회적 상호작용 자체가 극적으로 과장된 행동, 반응, 반응 중단을 주고받는 무대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미숙한 공연자의 손에 들린 각본도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생명력은 극적 실현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온 세상이 다 무대는 아니지만, 세상이 무대가 아님을 결정적으로 밝힐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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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공연이나 사기극에서는 배역 연기의 내용 중 말로 표현할 부분에는 치밀하게 구성한 대본이 필요하지만, '암시 표현'이 필요한 방대한 부분은 흔히 모호한 무대 지시만 주어질 뿐이다. 환상을 보여주는 공연자라면 자기 목소리, 얼굴 표정, 태도를 관리하는 방법을 상당히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공연자나 연출자가 그런 종류의 지식을 일일이 말로 진술하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직한 보통 사람을 만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사회화를 통해 어느 한 가지 배역의 구체적 세목을 모두 학습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만한 충분한 시간이나 에너지가 없을 때가 많다. 개인은 어떤 배역을 맡든, 그 배역을 '채울' 만큼 표현법을 충분히 익혀두기만 하면 된다. 일상 삶의 진솔한 공연은 개인이 할 일이 무엇인지 미리 알고 또 원하는 효과를 겨냥해 '연기'하는 '연출'된 공연이 아니다. 암시 표현이란 그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연출된 연기를 하는 공연자처럼 자기의 시선과 몸 움직임을 미리 능숙하게 고안할 능력이 없다고 해서 자기의 행동 목록 중에서 이미 극화된 수단을 택해 자기 표현을 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우리는 모두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연기를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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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린 사람은 지켜보는 사람들과 올바른 사회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의 접신 상태는 그가 신들린 다른 무리와 더불어 일종의 짧은 종교극에 참여하여 의례적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신들린 당사자를 둘러싼 맥락의 구조화가 신도들로 하여금 접신 상태가 참이며, 그들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신이 접신 대상을 정한다고 믿게 한다는 점이다.


또한 미국에서 중간 계급의 젊은 여성이 남자친구를 위해 침묵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그녀의 행동에서 교활한 책략을 쓴 부분을 즉각 짚어낸다. ... 그러나 우리는 그 공연의 더 큰 부분은 간과한다. 상이한 사회집단들은 나이, 성별, 지역, 계급 지위 같은 속성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며, 그 적나라한 속성들을 나름의 독특한 문화적 복합체로 잘 다듬어 적절한 처신으로 삼는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주어진 지위에 적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필요한 속성을 갖추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품행의 기준과 소속 집단이 중요시하는 겉모습도 지켜야 한다. 공연자가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기준을 지키며 배역 연기를 계속한다고 해서 공연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참여자가 의식적으로 하는 공연이 아니라는 뜻일 뿐이다.

 

지위, 직위, 사회적 위치는 소유하고 과시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니라 일관성 있고, 미화되고, 적절하게 다듬어진 품행의 일종이다. 매끄럽든 어설프든, 의식적인 것이든 아니든, 교활하든 진실하든, 공연으로 실현해야 하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사르트르가 좋은 예를 들었다.

카페에서 일하는 종업원을 생각해보자. ... 그는 카페의 종업원 게임을 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하나도 없다. 어린 아이는 자기 몸을 탐구하고, 목록을 작성하고, 가지고 논다. 카페 종업원은 종업원이라는 존재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의 존재 조건을 가지고 게임을 한다. 게임은 모든 직업인에게 부여된 의무와 다를 바 없다. 직업인의 존재 조건은 전적으로 의례의 한 요소다. 대중은 그들에게 의례로 직업인을 실현해주기를 바란다. .. 몽상에 잠긴 식료품 장인은 구매자에게는 모욕이다. .. 보초병에게 차렷자세로 똑바로 앞을 보면서도 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볼 마음도 없는 군인 기계가 되라고 지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시선을 고정해야 할 지점('10보 앞')을 결정하는 것은 규율이지 보초병의 관심사가 아니다. 마치 한 사람이 느닷없이 자기를 가둔 조건을 무너뜨리고 도망치지나 않을까 하는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처럼, 우리는 실로 한 사람을 가두려는 수많은 예방 조치들에 둘러싸여 있다.


pp.95-102

어빙 고프만, 자아연출의 사회학-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기하는가